

충칭 대한민국 임시정부
충칭(重慶)은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중국 관내에서 최종적으로 정착한 도시이다. 1940년 9월 인근의 치장으로부터 이전하여 정착한 이래 1945년 해방을 맞아 환국할 때까지 이곳에서 활동하였다.
충칭 시기 임시정부는 독립운동의 중추 기구로서 실질적인 역할을 할 수 있었다. 중국 정부의 도움으로 임시정부는 활발하게 독립운동을 펼쳤다. 임시정부는 충칭에서 군사∙외교∙행정 등 여러 분야에 걸쳐 많은 활동을 하였다.

충칭에 정착한 임시정부는 임시헌법 개정을 통해 주석제를 도입하여 3월 13일 주석에 김구를 옹립했다. 5월에는 새로이 한국독립당을 창당하였고, 임시정부의 여당이 되었다.
9월 17일에는 지청천을 총사령으로 삼는 한국광복군을 조직했다.
1941년 11월 28일 조소앙의 삼균주의를 채택하고 보통선거를 통한 민주 공화국의 수립 등의 내용을 골자로하는 건국 강령을 발표했다.
1943년 임시정부의 김구는 장제스를 만나 카이로 회담서 한국의 독립을 결의해줄 것을 당부했고 장제스는 이를 약속하였다. 이후 카이로 회담서 장제스는 미국과 영국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독립을 강력히 주장했고 결국 "적절한 시기에 한국을 독립시킨다."는 문구로 합의가 이루어졌다.
%20(15).jpg)

충칭지역에 임시정부의 첫 번째 청사는 양류가(楊柳街)에 있었다. 양류가에 있었던 임시정부 청사는 일제의 폭격 등 여러 이유로 석판가와 오사야항 위치로 옮겨갔다.
이중 오사야항은 전형적인 2층 목조가옥으로 70여 칸의 큰 규모였다. 이곳은 김구가 『백범일지』 하권을 저술한 장소이기도 하다. 1944년 하반기 임시정부는 청사를 연화지 4호로 옮겼다. 김구를 비롯한 임시정부 요인들은 1945년 8월 일제가 패망하기까지 이곳에서 활발한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충칭지역에서 임시정부 청사의 원형을 유지하고 있는 곳은 연화지가 유일하다.
양류가와 석판가에 위치한 청사는 일제의 폭격으로 파괴되었다. 오사야항 청사는 1995년 당시 원형이 변형된 상태로 남아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