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집트 카이로


기자주의 유명 관광명소인 대피라미드 앞에 있는 메나하우스는 1943년 일제 식민지 상태에 있던 한국의 독립을 미국과 영국, 중국 정상이 국제사회에 처음으로 천명한 '카이로 선언'의 실무회담이 열린 곳이다.


1943년 11월 23일부터 26일까지 이집트 카이로에서 미·영·중 3국 정상들이 모여 회의를 개최했다. 이 회의에서 3국 정상들은
"한국인의 노예 상태에 유의하여 적당한 시기에 한국을 자유 독립하게 할 것을 결의"
했고, 이를 12월 1일 선언했다. 한국은 당시 연합국으로부터 독립을 보장받은 유일한 국가로 이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외교 활동이 거둔 가장 큰 성과였다.
[국립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 공식 소개문]

카이로선언 초안-미 국무부

▲미군의 지원 아래 한국광복군 대원에게 OSS(Office of Strategic Service) 훈련을 시킬 것을 협의한 후 회의장을 나서는 김구와 미국측 대표미군의 지원 아래 한국광복군 대원에게 OSS(Office of Strategic Service) 훈련을 시킬 것을 협의한 후 회의장을 나서는 김구와 미국측 대표 ⓒ 한길사
임시정부가 카이로 선언을 이끌어내기 위해 한 일
임시정부는 1942년부터 연합국 내에서 논의되던 '국제공동관리'(한국을 일본 패망 후 열강이 공동 통치) 방안에 강력히 반대하며, 국제 여론을 환기시켰다.
1943년 2월 조소앙 외무부장 명의로 국제공동관리에 반대하는 성명서를 발표하고, 5월에는 중경에서 재중국자유한인대회를 열어 독립 의지를 천명했다.
임시정부는 미국, 영국, 소련 등 주요 연합국에 국제공동관리에 반대하는 전보를 보내고, 언론을 통해 독립 요구를 적극적으로 알렸다.

-임시정부의 요청.
임시정부의 김구 주석, 조소앙 외무부장 등 주요 인사들은 카이로 회의 개최 정보를 입수한 뒤, 장개석(장제스) 중국 총통을 여러 차례 직접 면담했다. 1943년 7월 26일 김구 등 임시정부 요인들은 장개석에게 카이로회의에서 반드시 한국의 독립을 관철해 달라고 요청했고, 장개석은 이를 약속했다
이후 장개석이 카이로회의에서 직접 '한국의 자유독립'을 강하게 주장해, 최종적으로 카이로 선언에 "한국을 자유롭고 독립되게 한다"는 내용이 포함되었다
-카이로선언에서 임시정부의 역할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국제공동관리 반대운동, 연합국 대상 외교전, 중국 정부와의 긴밀한 협력을 통해 카이로 선언에 '한국의 자유독립'을 명문화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이는 임시정부의 적극적 외교와 독립 의지 표명이 없었다면 얻기 어려운 성과였다.

